계암정
계암(溪巖) 김령(1577~1641)은 평생 대의명분을 신조로, 광해~인조 연간의 혼탁한 시절 속에서도 꼿꼿하게 지조를 끝까지 지키는 선비의 삶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지조(志操)의 꿋꿋함, 풍절(風節)의 고결함은 사림(士林)의 모범이 된다.’ 계암 별세 후, 숙종 때 도승지를 추증하면서 그에게 내린 교지(敎旨)에서 계암을 평한 글이다.
인조실록은 계암에 대해 ‘성품이 차분하고 지조가 있어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여 종신토록 영(嶺)을 넘지 않아 세칭 영남제일인(嶺南第一人)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졸재(拙齋) 류원지는 ‘계암 선생이 행한 일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던 백이숙제(伯夷叔齊)보다 더한 어려움이 있는 일이었으며, 엄자릉(嚴子陵)보다 한 등이 높다’고 평가했다. 계암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평가들이다.
계암의 부친은 설월당(雪月堂) 김부륜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설월당은 전라도 동복(同福) 현감을 지낸 학자이고, 설월당 부친은 탁청정(濯淸亭) 김유다. 부친이 서울에서 벼슬생활을 하던 1577년 서울에서 태어난 계암은 일찍부터 가학(家學)을 배우면서 학문을 익혀갔다. 1585년 부친이 동복 현감으로 부임하자 임소로 따라가 지냈는데, 9세의 아이로 부친이 출타하고 없을 때, 찾아온 손님을 예를 다해 접대함으로써 놀라게 하기도 했다.
계암 14세 때(1590년)의 일이다. 계암은 부친이 잠이 들면 부친의 말을 타고 안동 기방(妓房)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오곤 했다. 얼마 뒤 이를 알게 된 부친은 계암을 불러 눈물을 보이며 간곡하게 훈계를 했고, 계암은 그 후 다시는 그러지 않았다. 뒷날 기녀가 찾아와 한 번 얼굴만이라도 보고자 했으나, 계암은 “부친의 훈교가 있었는데 어찌 전과 같겠는가”라고 거절하며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계암은 평생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1594년에 결혼했고 1612년 36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615년에는 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을 제수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북인의 정치에 실망한 그는 다음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며 독서로 나날을 보냈다. 이후 수십차례에 걸쳐 여러 직책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광해군 정권의 인목대비 폐비 사건이 일어나고 신하의 농단으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운 시절이라, 계암은 이에 반대해 나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집에 칩거하던 계암은 평소 알던 사람이라도 시류에 부합하며 이익을 구하는 이와는 교제를 끊었고, 만나기를 청해도 거부했다. 자신을 헐뜯고 원망하는 일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계암정
계암이 김곡에게 “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이 광해군을 쫓아내고 새 임금을 맞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새 임금이 반정군의 진중에 가서 함께 거사했는가”라고 물었고, 후자라는 대답을 들은 계암은 탄식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계암은 충주부(忠州府)에서 이틀간 머문 뒤 병을 구실로 사직서를 내고 귀향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며칠간 자리에 누워 멀건 죽만 먹을 뿐이었다. 부인이 “무슨 병이기에 잡수지 못하십니까” 하고 묻자 주위를 물리고 그 사정을 실토했다.
새 임금에게 기대를 걸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새 임금이 반정에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낙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조반정 때 영남 인사 중 조정의 부름을 받고 출사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계암도 광해군과 북인정권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지만, 그런 반정은 문제가 있어 정당시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듬해(1624년) 봄 이괄(李适)의 난으로 임금이 공주에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암은 급히 서울을 향해 달려가 서울 근교에 이르니 난은 이미 평정되었다. 이에 아들을 시켜, 병으로 취임할 수 없다는 내용의 상서(上書)를 올리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임금은 상서를 보고 계암이 병고에도 불구하고 난중에 취한 처신을 가상하게 여기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헌납(獻納ㆍ사간원 관직) 김시양이 비답에 대해, 산림의 선비가 아닌 과거 출신으로 아들을 시켜 대신 상소를 올린 것은 극히 외람된 거동이므로 파직함이 마땅하니 비답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계암의 일관된 태도를 통해 그 뜻을 짐작하게 된 김시양은 “계암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을 몰랐구나. 전에 내가 탄핵한 것을 그는 비웃었으리라. 나는 사람을 너무 몰랐구나”라고 탄식했다 한다.
계암정
인조는 이후에도 성균관 전적, 형조정랑, 의주판관, 예조정랑 등의 벼슬을 계속 내렸으나 계암은 취임하지 않았다. 예조정랑 제수 이후에는 중풍으로 수족을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아예 방 안에만 머물렀다. 여러 권신들은 그의 병이 거짓이 아닌가 의심하며, 방백(方伯)에게 정탐해볼 것을 청하곤 했다. 방백들이 직접 집으로 찾아가 보니 계암은 그때마다 앉아서 맞았고, 돌아가 거짓 병이 아님을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년간 예조정랑, 헌납, 사간 등을 20차례 정도 제수 받았으나 어느 관직에도 취임하지 않았다. 언젠가 선비들과 어울린 자리에서 누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음에 대해 묻자 계암은 입을 닫고 있다가, 여러 사람이 끈질기게 요구하자 천천히 말하기를 ‘홀어미 된 여인이 지아비의 불의를 핑계 삼아 절개를 바꾸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했다.
계암은 의리가 지켜지지 않는 세상과 담을 쌓고, 그렇게 18년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지냈다. 보던 책들은 표지를 가려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무슨 책인지 모르게 하고, 누구에게 보내는 사연도 편지가 아니라 사람을 시켜 말로 전하게 했다. 의롭지 않은 것은 겨자씨 하나라도 받지 않고, 언제나 장중단엄( 莊重端嚴)한 계암에게서 사람들은 범할 수 없는 기색을 보며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위기에 처하자, 계암은 맏아들을 의병으로 보내고 가산을 털어 군비에 보태도록 했다. 다음해 봄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계암은 조선이 오랑캐에게 굴복한 치욕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통분(痛憤)의 마음을 글로 토해냈다. 1637년 가을에 또 사간(司諫)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로는 조정에서도 그 뜻을 알고 다시는 벼슬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방 안에 홀로 거처하며, 누가 찾아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앉아서 맞았고, 사람들은 그 뜻을 짐작하며 더욱 우러러 보았다. 계암의 지조 있는 삶은 후대에 제대로 평가를 받으면서 숙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고, 순조 때는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文貞)도 받게 된다.
계암이 별세할 때까지 약 38년간 쓴 일기 ‘계암일록’